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문단 편집) == 미군정 시대 == 1950~60년대 당시 일본에선 [[안보투쟁]]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일본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본토 내의 미군기지를 1/4까지 줄이는 데 합의했지만 결과적으론 본토에서 줄어든 기지만큼 오키나와의 미군 규모가 증강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기지화하면서 현지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시작한다. 먼저 기지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해 땅을 빼앗거나 헐값에 강매하도록 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고, 1954년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해 미군은 오키나와의 경제를 흔드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 전쟁 직후의 오키나와의 실질적인 화폐는 미군의 [[군표]]였다.] 결국 땅값을 올려서 지불하는 것으로 오키나와 주민들과 어거지로나마 합의하였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속속 들어서면서 미군 관련 사건사고도 크게 증가했다. 1959년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를 비롯하여 잦은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 오키나와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게다가 사격 훈련으로 자연이나 농지가 훼손되고, 군사기지에서 나온 오염물질이 우물이나 하천을 오염시켰다.[* 한때 미군 훈련장이었던 [[얀바루 국립공원]] 같은 곳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당시 미군이 버린 폐기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원자력 잠수함에서 방사능이 누출되기까지 했다. 1969년에는 치명적인 독가스를 미군이 오키나와에 대량 비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누출사고로 인해 폭로되기도 했다.[* 이 독가스는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 끝에 1971년 초 태평양의 존스턴 환초로 이송된다.(레드 햇 작전) 이 사건은 [[돌아온 울트라맨]]의 [[독가스괴수 모그네즌]]의 모티브가 되었다.] 미군 병사에 의한 범죄도 매우 자주 발생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미군은 술과 마약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도 증거불충분 등으로 무죄를 선고받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 12월에는 주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미군 병사의 뺑소니로 인해 [[코자시]](コザ市)에서 코자 폭동(コザ暴動)이 발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 미군정 하에서는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분위기가 생겨나 1960년 오키나와 조국 복귀 협의회(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조직되어 조국복귀운동(祖国復帰運動)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귀속되면 본토의 [[평화헌법]]이 적용되어 미군 기지를 철수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진행된 운동이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 [[안보투쟁]]에 참여하거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도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오키나와는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을 [[커티스 르메이|석기시대]]로 되돌려보내던 [[B-52]] 폭격기의 기지로 쓰이는 등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중요한 후방 지원기지였다.]를 쫓아내기 위해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을 지지했다. [YouTube(/9df-Z2RW75I)]고자 폭동(コザ暴動)과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의 여러 모습들.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가 1965년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반환 없이는 일본에 전후(戰後)란 없다"고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9년 사토 에이사쿠와 [[리처드 닉슨]]과의 회담에서 1972년에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것으로 양측은 합의하였다. 1972년 당시의 '복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역 내에서 독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많고 오키나와 현에서도 독립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지만, 독립하고자 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장을 묵살해 버리고 날치기로 오키나와 현 유지안을 통과시켰다는 설도 있어 두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당시 주민의 24.9%는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미군 [[핵무기]] 철수를 포함한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에 대해 반대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상사태 발생 시 전쟁 억지력의 감소를 심각하게 우려했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22453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